2025년 9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박서보 탄생 95주년 특별전: 색과 여백’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1931~2023)의 예술세계를 기념하고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입니다. 이번 전시는 박서보 화백이 평생 추구해온 ‘묘법(描法)’ 시리즈와 색채 추상 작업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국내외 미공개작 및 아카이브 자료까지 포함해 총 120여 점 이상의 작품이 전시될 예정입니다. 단색을 통한 정신성과 행위, 예술과 수행의 경계를 허문 박서보의 세계를 가장 깊이 있게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펼쳐지는 단색화의 정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한국 현대미술사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기관으로, 이번 박서보 특별전은 작가의 탄생 95주년을 기념하는 국가적 차원의 대형 회고전으로서 기획되었습니다. 전시는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묘법’, ‘색채묘법’, 그리고 후기 자연 회귀적 회화까지 세 시기로 나뉘어 구성되며, 각 시기별 사유와 표현의 변화 과정을 체계적으로 보여줍니다.
전시 서두에는 1970년대 초반 시작된 박서보의 ‘묘법’ 연작들이 소개됩니다. 한지를 물에 적시고 연필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나간 이 시리즈는 단순한 조형을 넘어, 선의 반복 행위 자체를 수행적 예술로 끌어올린 독창적 방식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71년작 〈묘법 No.1〉을 포함한 초기작부터, 붓 대신 손가락으로 한지를 밀어낸 후기작까지 총망라되며, 관람객은 박서보 회화의 핵심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시장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배열되어 있어, 작가가 연필 선을 긋던 1970년대의 수행적 접근에서 점차 색과 물성, 자연 이미지로 확장해가는 과정을 따라갈 수 있도록 구성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박서보를 “한국 미술의 고유한 정신성을 세계로 전파한 인물”로 규정하며, 이번 전시를 통해 단색화가 단순한 양식이 아닌 사유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임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묘법과 색, 행위에서 감성으로 확장된 회화
박서보의 ‘묘법’은 단순히 반복되는 선 긋기의 형식이 아니라, 내면의 질서를 찾아가는 정신적 수행 행위로 시작됩니다. 그는 한지를 물에 적시고 연필을 수십, 수백 번 반복적으로 그어 나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과 감정을 내려놓고 순수한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예술을 추구했습니다. 이는 서양의 추상표현주의가 감정의 분출에 중점을 둔 반면, 박서보는 감정을 비우고 사유로 침잠하는 동양적 예술을 실천한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는 묘법에 색을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색채묘법 시기가 도래합니다. 초기에는 그레이 톤이나 흙빛 계열처럼 절제된 색상이 주를 이뤘지만, 이후에는 연두색, 분홍색, 옥색, 주황 등 보다 풍부한 자연의 색감이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색의 변화는 단지 시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박서보가 예술을 통해 세상을 긍정하고, 자연과 조화되는 존재로서의 삶의 태도를 반영한 결과입니다.
그는 “묘법은 내 삶 자체였고, 매일 매일의 명상이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비우고 또 비우며 선을 긋는 행위, 그 위에 다시 색을 덮는 반복의 흐름 속에서, 감각적이면서도 명상적인 울림을 전해줍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작가 생전 마지막 작업실을 그대로 옮긴 특별 섹션도 마련되어, 관람객은 그가 앉아 작업하던 책상, 연필, 채색 도구 등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삶과 감정에 한층 더 깊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한국 단색화의 세계화와 박서보의 위치
박서보는 한국 미술사에서 단색화의 기틀을 닦은 인물이자, 이를 국제미술계로 확장시킨 주역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2000년대 이후 파리 퐁피두센터, 런던 화이트큐브, 뉴욕 구겐하임 등에서 대형 개인전을 열며, 한국 단색화가 단지 동양적 양식이 아닌, 세계 미술 언어로 기능할 수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동양철학, 선사상, 그리고 무위(無爲)의 태도와 맞닿아 있으며, 특히 반복과 절제 속에서 생성되는 여백은 서구 미술계에서도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2010년대에는 한국 단색화 붐의 중심에 있었으며, 윤형근, 정상화, 하종현 등과 함께 소개된 전시에서 중심작가로 항상 자리했습니다. 그러나 박서보의 작품은 단색화라는 범주에만 가두기 어려운 독자적 회화 언어를 구축했기 때문에, 이번 회고전은 그를 단색화의 대표가 아닌, 한국 추상회화의 독립적 사유자로서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그가 해외에서 발표했던 주요작품 중 일부가 국내 최초로 공개되며, 국제 무대에서의 예술적 위상을 되짚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유럽 컬렉터 소장 작품을 포함해, 작가의 영향력을 뒷받침하는 문서, 비평, 도록 등 아카이브도 함께 전시됩니다. 이처럼 박서보는 단지 회화 기술의 대가가 아니라, 예술로 존재를 탐구한 현대적 선사상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번 전시는 그 궤적을 온전히 체감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획입니다.
박서보 탄생 95주년 특별전 <색과 여백>은 단색화라는 양식을 넘어, 삶과 예술의 본질을 성찰한 예술가의 여정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입니다. 반복과 비움, 색과 시간의 층위를 통해 그가 전하려 한 ‘존재의 질서’를 온몸으로 느껴보세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이 귀중한 전시, 가을이 깊어질수록 더 큰 울림을 줄 것입니다. 일정 확인 후, 묵상의 시간을 가져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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